후쿠다 야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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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다 야스오는 1936년 도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마루젠 석유에 입사하여 과장으로 퇴직했다. 1976년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비서관을 거쳐, 1990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6선 의원을 지냈다.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도 관방장관과 남녀공동참가 담당대신을 지냈다. 2007년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어 총리가 되었으나, 2008년 사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일미동맹 강화, 대외정보기관 신설, 이란의 핵 개발 문제, 방위비 증액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논란과 비판에도 직면했으며, 2012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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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야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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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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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후쿠다 야스오 |
일본어 표기 | 福田 康夫 |
로마자 표기 | Yasuo Fukuda |
출생일 | 1936년 7월 16일 |
출생지 | 도쿄부 도쿄시 세타가야구 |
배우자 | 후쿠다 기요코 |
자녀 | 1명 (후쿠다 다쓰오)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학력 | 와세다대학교 경제학 학사 |
부모 | 후쿠다 다케오 |
친족 | 조부: 후쿠다 젠지 외조부: 사쿠라우치 유키오 (전 중의원 의원) 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 전 중의원 의원) 백부: 후쿠다 헤이시로 숙부: 후쿠다 고이치 (전 참의원 의원) 외숙부: 사쿠라우치 요시오 (전 외무대신, 전 중의원 의원) 매형: 오치 미치오 (전 경제기획청 장관, 전 중의원 의원) 장남: 후쿠다 다쓰오 (중의원 의원) 조카: 오치 다카오 (중의원 의원) |
정치 경력 | |
직위 | 제91대 내각총리대신 제67-69대 내각관방장관 남녀 공동 참여 담당 대신 제41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중의원 의원 제22대 자유민주당 총재 |
총리 임기 시작 | 2007년 9월 26일 |
총리 임기 종료 | 2008년 9월 24일 |
내각 | 후쿠다 야스오 내각 후쿠다 야스오 개조 내각 |
관방장관 임기 시작 | 2000년 10월 27일 |
관방장관 임기 종료 | 2004년 5월 7일 |
관방장관 내각 | 제2차 모리 내각 제2차 모리 개조 내각 (성청 재편 전) 제2차 모리 개조 내각 (성청 재편 후)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1차 고이즈미 제1차 개조 내각 제1차 고이즈미 제2차 개조 내각 제2차 고이즈미 내각 |
남녀 공동 참여 담당 대신 임기 시작 | 2001년 1월 6일 |
남녀 공동 참여 담당 대신 임기 종료 | 2004년 5월 7일 |
남녀 공동 참여 담당 대신 내각 | 제2차 모리 개조 내각 (성청 재편 후)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1차 고이즈미 제1차 개조 내각 제1차 고이즈미 제2차 개조 내각 제2차 고이즈미 내각 |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임기 시작 | 2000년 10월 27일 |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임기 종료 | 2000년 12월 5일 |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내각 | 제2차 모리 내각 |
중의원 임기 시작 | 1990년 2월 18일 |
중의원 임기 종료 | 2012년 11월 16일 |
중의원 선거구 | 구 군마 3구 군마 4구 |
중의원 당선 횟수 | 7회 |
총재 임기 시작 | 2007년 9월 23일 |
총재 임기 종료 | 2008년 9월 22일 |
이전 총리 | 아베 신조 |
다음 총리 | 아소 다로 |
이전 관방장관 | 나카가와 히데나오 |
다음 관방장관 | 호소다 히로유키 |
이전 총재 | 아베 신조 |
다음 총재 | 아소 다로 |
국왕 | 아키히토 |
다수당 | 118,517 (62.83%) |
비서관 | 이부키 분메이, 아소 다로 |
기타 | |
공식 웹사이트 | www.y-fukuda.or.jp |
현재 직위 | 보아오 아시아 포럼 자문위원회 주석 아시아 인구 개발 협회 이사장 |
경력 | |
전직 | 마루젠 석유 (현 코스모 석유) 직원 중의원 의원 비서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
학위 | 경제학사 (와세다대학교, 1959년) |
2. 생애
도쿄도 도쿄시에서 태어나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성장했다. 1959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마루젠 석유에 입사하여 과장으로 퇴직하였다.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내각총리대신의 비서관 등을 지내다가 1990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95년 외무 정무 차관, 1997년 자민당 외교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2000년 모리 요시로 내각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맡았다.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사건으로 2004년 5월 사임하였는데, 이는 일본 역대 관방장관 중 최장 기간(1,289일) 재임 기록이었다.
2007년 9월 23일, 아소 다로 간사장을 제치고 자민당 제22대 총재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9월 25일 중의원 총리 지명 선거에서 338표를 얻어 제91대 일본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지지율이 30%대로 하락하면서 2008년 9월 1일 사임 의사를 발표했고,[296] 1년 만에 아소 정권으로 교체되었다.[297]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 조문 사절로 한국을 방문했다.
연도 | 사건 |
---|---|
1990년 2월 | 중의원 의원 당선 (총 6선) |
1995년 8월 | 무라야마 내각 외무 정무 차관 |
1997년 9월 | 자민당 부간사장 |
2000년 7월 | 자민당 정조부회장 |
2000년 10월 | 모리 내각 관방장관 |
2004년 5월 |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문제로 관방장관 사임 |
2004년 10월 | 모리파 대표 간사 |
2007년 9월 23일 | 자민당 총재 선거 당선 |
2007년 9월 25일 | 총리 대신 지명 |
2008년 9월 2일 | 총리 사임 의사 공식 표명 |
2008년 9월 24일 | 총리직 사임 |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도쿄도 도쿄시에서 태어나,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자랐다.[1] 1959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59년부터 1976년까지 마루젠 석유에 입사하여 과장으로 퇴직하였다.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내각총리대신의 비서관 등을 지내다가, 1990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후쿠다 야스오는 후쿠다 다케오(훗날 제67대 총리)의 장남으로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태어났다. 도쿄 세타가야구에서 자랐으며, 아자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마루젠석유(현재 코스모석유의 일부)에 입사했다. 이후 17년 동안 정치에 최소한으로만 관여하며, 전형적인 일본의 '샐러리맨'으로서 부서장까지 승진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에 파견되었다.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총리였던 동안, 정무 비서관을 역임했다. 1978년부터 1989년까지 금재경제연구소(金財研究所) 이사를 역임했으며, 1986년부터 이사로 재직했다.[3]
1936년(쇼와 11년) 7월 16일, 도쿄부 도쿄시 세타가야구(현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대장성 관료였던 후쿠다 다케오와 후쿠다 미에(福田三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0]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아버지가 중화민국(1912년-1949년) 왕징웨이 정권의 재정 고문을 지낸 관계로 3개월 동안 난징에 살면서 난징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품게 되었다.[41] 전시 중에는 아버지의 친가인 군마현 군마군 가나고정(후에 군마정, 현 다카사키시)으로 피난을 갔다.[43] 가나고정립 가나고소학교(현 다카사키시립 가나고소학교), 오미야시립 남소학교(현 사이타마시립 오미야남소학교), 도쿄고등사범부속소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소학교), 시부야구립 사루가쿠소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49년(쇼와 24년) 3월, 도쿄제1사범학교 남학부 부속소학교(현 도쿄학예대학 부속세타가야소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생 시절 후쿠다는 야구를 좋아하는 스포츠 소년이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대사를 지낸 다니노 사쿠타로(谷野作太郎)와는 이때부터 교류가 있었다.[42]
1952년(쇼와 27년) 3월, 아자부중학교, 1955년(쇼와 30년) 3월, 아자부고등학교를 졸업했다.[233]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문학과 음악에 심취했고, 성적이 우수했다.[43][44] 동급생에는 성우 시바타 히데카쓰(柴田秀勝)와 물류 대기업 산리츠(サンリツ) 회장인 미우라 마사히데(三浦正英) 등이 있다.[43]
1959년(쇼와 34년) 3월, 와세다 대학 제1정경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오사카에 본사를 둔 마루젠석유(丸善石油)(현 코스모석유)에 입사하여 1962년(쇼와 37년) 3월부터 2년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점에 파견되었다.[233] 귀국 후에는 석유 제품 수입과장을 역임하면서 석유의 가격 및 수량 동향 예측, 판단, 산지국으로부터의 석유 조달 및 수입 업무 등을 담당했다.[45][46][55] 이때 제1차 오일 쇼크를 경험했다.[47]
1966년(쇼와 41년)에 전 중의원 의장 사쿠라우치 요시오(桜内義雄)의 조카인 후쿠다 기요코(嶺貴代子)와 "정치가의 아내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결혼했다.[42]
정계 입문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후쿠다였지만, 아들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여겨졌던 차남이자 양자였던 요코테 마사오(横手雅夫)가 병이 들자, 어머니 후쿠다 미에가 후계자로 추천한 것도 있어 정치가를 지망하게 되었다.[42][48] 1976년 11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중의원 의원 비서가 되었고,[233] 1977년 12월부터 1년간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의 내각총리대신 비서관을 역임했다.
2. 2. 정치 경력
후쿠다 야스오는 1990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1] 1995년에는 무라야마 내각에서 외무 정무 차관을 지냈으며, 1997년에는 자유민주당 부간사장을 역임했다. 2000년 모리 요시로 내각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맡았으며,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사건으로 2004년 5월 사임했다. 그는 역대 관방장관 중 최장 기간인 1,289일 동안 재임했다.2007년 9월 23일, 아소 다로 간사장을 제치고 자민당 제22대 총재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9월 25일 중의원 총리 지명 선거에서 총 투표수 477표 중 338표를 얻어 제91대 일본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지지도가 30%대로 하락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2008년 9월 1일 밤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사임 의사를 공식 발표했다.[296] 이로써 후쿠다 정권은 1년 만에 막을 내리고 아소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297]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과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 조문 사절로 한국을 방문했다.
다음은 후쿠다 야스오의 주요 정치 경력이다.
연도 | 사건 |
---|---|
1990년 2월 | 중의원 의원 당선 (총 6선) |
1995년 8월 | 무라야마 내각 외무 정무 차관 |
1997년 9월 | 자민당 부간사장 |
2000년 7월 | 자민당 정조부회장 |
2000년 10월 | 모리 내각 관방장관 |
2004년 5월 |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문제로 관방장관 사임 |
2004년 10월 | 모리파 대표 간사 |
2007년 9월 23일 | 자민당 총재 선거 당선 |
2007년 9월 25일 | 총리 대신 지명 |
2008년 9월 2일 | 총리 사임 의사 공식 표명 |
2008년 9월 24일 | 총리직 사임 |
2. 3. 총리 재임 기간 주요 활동
2007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후쿠다 야스오 내각 문서 참고.
2007년 9월 아베 신조의 사임 이후, 후쿠다 야스오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후쿠다는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이끄는 자민당 최대 파벌(후쿠다도 이 파벌에 속함)의 지지를 포함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다.[1] 누카가 후쿠시로도 후쿠다를 지지했다.[6] 유일한 경쟁자였던 아소 다로는 선거 1주일 전 자신의 패배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7]
9월 23일 선거에서 후쿠다는 아소를 330표 대 197표로 누르고 당선되었다.[8] 9월 25일, 중의원에서 338표를 얻어 공식적으로 일본 제91대 총리로 선출되었다.[9] 그러나 야당인 민주당이 주도하는 참의원에서는 오자와 이치로가 후쿠다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이 교착 상태는 일본국 헌법 제67조에 따라 중의원의 선택을 따르는 것으로 해결되었다.[9][10]
후쿠다와 그의 내각은 9월 26일 아키히토 일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취임했다.[11]
2008년 6월 11일, 야당이 장악한 참의원에서 후쿠다 야스오에 대한 비구속성 불신임안이 통과되었다. 이는 일본 전후 헌법 하에서 수상에 대한 최초의 불신임안이었다. G8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 안건은 국내 문제 처리에 대한 그의 대응을 비판하며 조기 총선 또는 사퇴를 촉구하였다.[12][13][14] 6월 12일, 하원 여당 연합은 신임 투표를 통과시켰다.[15]


2008년 9월 1일, 후쿠다 야스오는 정치 과정의 원활한 흐름 개선을 이유로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자민당과 야당이 장악한 중의원 간의 교착 상태로 인한 입법 및 정치 과정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사임한다고 밝혔다.[16]
이 사임으로 자민당 총재 선거가 치러졌고, 아소 다로가 후쿠다 야스오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17]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고령자를 위한 의료 계획으로 인해 한때 30%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18][19]
아소 다로는 9월 22일 후쿠다 야스오의 후임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후쿠다 야스오와 그의 내각은 2008년 9월 24일 전원 사퇴했고, 아소 다로는 같은 날 중의원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20]
후쿠다 야스오 내각은 2007년 9월 26일에 출범했으며, 아베 신조 내각과 거의 동일했다.[32][33] 내각 출범 후 지지율은 꾸준히 하락하여 2008년 4월 말에는 불신임율 60%, 지지율 25%를 기록했다. 후쿠다는 2008년 8월 1일에 내각 개편을 단행했다.[34]

직책 | 이름 |
---|---|
관방장관 | 마치무라 노부타카 |
총무대신 | 마스다 히로야 |
법무대신 | 하토야마 쿠니오 |
외무대신 | 고무라 마사히코 |
재무대신 | 누카가 후쿠시로 |
문부과학대신 | 도카이 기사부로 |
후생노동대신 | 마스조 요이치 |
농림수산대신 |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
경제산업대신 | 아마리 아키라 |
국토교통대신 | 후유시바 테쓰조 |
환경대신 | 카모시타 이치로 |
방위대신 | 이시바 시게루 |
공안위원장, 재해방지 담당 | 이즈미 신야 |
경제정책 담당 | 오타 히로코 |
금융 서비스, 행정개혁 담당 | 와타나베 요시미 |
오키나와 및 북방영토 담당, 기술정책 담당, 규제개혁 담당 | 키시다 후미오 |
인구, 청소년 및 성평등 담당 | 카미카와 요코 |
후쿠다 야스오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국내외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활동을 펼쳤다.
3. 주요 정책 및 활동
주요 정책:
재정 정책:
소비자 및 사회 정책:
환경 정책:
기타 정책:
정치 관련 입장:
국내 재해 대응:
국제 관계:
후쿠다 내각 각료 명단 (2007년 9월 26일 출범):[32]
관방장관 | 마치무라 노부타카 |
---|---|
총무대신 | 마스다 히로야 |
법무대신 | 하토야마 쿠니오 |
외무대신 | 고무라 마사히코 |
재무대신 | 누카가 후쿠시로 |
문부과학대신 | 도카이 기사부로 |
후생노동대신 | 마스조 요이치 |
농림수산대신 |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
경제산업대신 | 아마리 아키라 |
국토교통대신 | 후유시바 테쓰조 |
환경대신 | 카모시타 이치로 |
방위대신 | 이시바 시게루 |
공안위원장, 재해방지 담당 | 이즈미 신야 |
경제정책 담당 | 오타 히로코 |
금융 서비스, 행정개혁 담당 | 와타나베 요시미 |
오키나와 및 북방영토 담당, 기술정책 담당, 규제개혁 담당 | 키시다 후미오 |
인구, 청소년 및 성평등 담당 | 카미카와 요코 |
3. 1. 외교 정책
2014년 6월, 후쿠다 야스오는 비밀리에 중국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는 고위 일본 정치 지도자와 중국 관리들 사이에서 거의 18개월 만에 이루어진 첫 만남이었다. 회담에서 후쿠다 야스오는 시진핑 주석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만나기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이후 7월 말 후쿠다 야스오는 아베 신조 총리에게 논의 내용을 전달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동의를 얻은 후쿠다 야스오는 베이징으로 돌아가 7월 28일 시진핑 주석에게 아베 신조 총리의 동의를 알리고, 2014년 11월에 열린 일중 정상회담의 기반을 마련했다.[21][22]2018년, 후쿠다 야스오는 중일 양국 기업인 및 전직 고위 관계자 간의 4차 대화에서 왕이 외교부장과 만났다.[23]
2019년 7월, 후쿠다 야스오는 홍콩에서 열린 양일간의 중미 무역 관계 포럼에서 연설했다. 이 포럼에는 증페이옌 전 중국 부총리 등 전직 정부 수장 및 관계자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기업인과 학자들이 참석했다. 후쿠다 야스오는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이를 "우리가 직면한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묘사했다. 그는 "중국이 취하는 각각의 조치는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했다.[24]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의 정상회담조차 열리지 않던 2014년 도쿄의 한일 교류를 위한 축제에서 후쿠다는 "서로(한일)의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확실히 만들어 나가야 한다."라며 한일 우호를 호소했다.[88] 2017년 8월 말에는 아베 신조를 "잘하고 있다. 자질도 있는 분이다."라고 평가하는 한편, 일본 정부가 미국과 한국과 연계하여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는 방침에 대해서는 "일미한 연합으로 중국 포위망 형태가 될 우려가 중국에는 있다. 중국 정부와 이야기하지 않으면 북한 문제 해결의 길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음으로써 일본 언론이 떠들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자신의 견해도 밝혔다.[89]
; 비핵삼원칙의 재검토
:2002년 5월 31일, 내각관방장관 재임 중, 일본은 이론적으로는 핵무기 보유가 가능하지만 정책 판단으로서 보유하지 않고 있다는 종래의 정부 답변을 했다. 그 직후 정부 수뇌가 "(미래) 국민이 핵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취지로 "비핵삼원칙 재검토"를 언급했다고 보도되었으나, 야당은 이를 후쿠다의 발언이라고 주장했다.[93] 오프레코(off the record) 발언이었지만, 비핵삼원칙 재검토로 받아들여져 비판을 불렀다. 같은 해 6월 10일, 국회에서 이러한 발언 등에 대한 집중 심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후쿠다는 "각 시대 상황에 따라 안보 문제는 국제 정세 등을 고려한 다양한 국민적 논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 "미래에 정부로서 비핵삼원칙을 재검토할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것은 자신의 본심이 아니다", "앞으로도 비핵삼원칙을 고수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취지로 해명했다.[94]
; 자위대 인도양 파병
:자위대 인도양 파병에 대해 긍정적이었으며, 내각관방장관 재임 시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의 제정을 주도하여 성립시켰다. 당시 내각관방참여였던 오카모토 유키오는 "안전하고 저렴하며, 게다가 국제사회로부터 평가받은 후쿠다식 외교의 면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95] 2007년 9월, 동법의 연장에 대해 "(해상자위대의 활동은) 일본의 국제평화협력의 하나의 기둥이다. 현행법의 연장이 시간적 제약으로 어렵다면, 신법을 고려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신법을 제출한다면, 임시국회다"[96]라는 생각을 표명했지만, 최종적으로 제168회 국회에 "테러대책 해상저지활동에 대한 보급지원활동의 실시에 관한 특별조치법"(소위 "신테러대책특조법", "보급지원특조법") 제출을 선택하여, 2008년 1월 11일에 보급지원특조법을 성립시켰다. 전년 11월 1일에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이 실효되었기 때문에, 해상자위대는 일단 인도양에서 철수했지만, 보급지원특조법 성립에 따라, 후쿠다는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재파병을 명령했다.
; 자위대 이라크 파병
:자위대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도 외무대신 가와구치 준코, 방위청장 이시바 시게루 등 관계 각료와 함께 정책 입안을 주도하고, 내각관방장관 재임 시 "이라크에 있어서의 인도부흥지원활동 및 안전확보지원활동의 실시에 관한 특별조치법"(소위 이라크특조법)을 성립시켰다.
; 방위성의 불상사
:모리야 타케마사에 대한 접대 문제나 주유량 은폐 문제 등 방위성의 불상사가 잇따라 발각됨에 따라, 후쿠다는 내각관방장관 무라마치 노부타카에게, 내각관방에 "방위성 개혁에 관한 유식자 회의"를 설치하여 대책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97]
:2007년 11월 28일의 자위대 고급 간부 회동에서는, "나레아이(馴れ合い, 유착), 와키아이아이(和気藹々, 화기애애)의 분위기가 아니다"[98]라고 후쿠다가 판단하고 방위성에 의한 영예례나 의장을 거부한 위에, 강기숙정의 철저를 훈시했다.[99]
; 미일동맹의 강화
:2008년 5월의 연설에서, 후쿠다는 미일동맹에 대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공공재"[100]라고 지적하고, 일본의 안정 유지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지역 협력의 기반으로 위치지었다. 더욱이, "일미동맹의 강화와, 아시아 외교의 공명"[100]을 제창하고, 일미의 동맹 관계의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고 표명했다.[101]
; 대외정보기관의 신설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된 미합중국의 외교 전문에 의하면, 후쿠다는 내각총리대신 재임 중에 대외정보기관의 신설을 지시했다고 한다.[102][103][104] 외교 전문에 의하면, 후쿠다는 2008년에 대외정보기관을 신설하도록 명령하고[102], 내각관방의 내각정보조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기관이 신설될 것으로 되어 있다.[102][103][104] 신기관은, 미합중국의 중앙정보국(CIA)이나 영국의 정보국 비밀정보부(SIS)를 모범으로 하고[102][103][104], 타국이나 테러리스트 등의 정보 수집에 종사한다고 한다.[102] 일본 국외에서의 정보 활동을 주무로 하는 기관의 신설은, 태평양 전쟁 후에서는 처음이다.[102][103][104] 또한, 내각정보관 미타니 히데후미는, 동맹국인 미합중국의 국무부 정보조사국 국장 랜달 포트와 협의하고, 신기관에서는 휴민트(HUMINT)가 우선 과제가 된다고 표명했다.[102][103] 덧붙여, 이 대외정보기관의 설립 준비 구상은, 후쿠다 정권을 계승한 아소 정권에 이어졌다고 한다.[102][103][104]
; 이란의 핵 개발 문제
:2008년 6월 3일, 로마에서의 일본과 이란과의 정상 회담에서, 후쿠다는 "일본과 이란은 석유 이외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는다. 장애는, 핵 개발, 미사일 등 안보 문제다"[105]라고 주장하고, 이란의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에게 핵 개발을 중지하도록 직접 요구했다.
: 아마디네자드는 후쿠다의 주장에 대해 반론했지만, 그때 "핵무기는 구식이고 효율이 나쁘고, 보유해도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잘 알고 있다"[105]고 말했다. 이 발언을 들은 후쿠다는 말꼬리를 잡아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105]고 하여 "대통령이 핵무기를 중심으로 안보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중시하고 싶다"[105]고 지적하고, 더욱이 거듭 "농축을 정지하는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고 싶다"[105]고 요구를 되풀이했다. 아마디네자드는 기존의 핵 보유국의 군축을 들어 다시 반론했기 때문에 논의가 백열하고, 최종적으로 아마디네자드가 "테헤란이나 도쿄에서 논의를 계속하고 싶다"[105]고 수습하게 되었다.
:그때, 후쿠다는 이란에서의 일본인 유학생 유괴 사건의 조기 해결도 동시에 요구하고, 아마디네자드로부터 "건강하게 가족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105]는 확답을 얻었다. 이란 당국은 범인 그룹이 피해자를 파키스탄 영내에 연행한 것까지 확인했지만, 이란은 "파키스탄에 빚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동국에 협력 요청을 하지 않고, 2007년 10월부터 교착 상태가 되어 있었다.[106] 그러나, 후쿠다의 요구에 따라 일본과의 외교 악화를 우려한 이란 당국은, 어쩔 수 없이 파키스탄에 수사 협력을 요청하고, 파키스탄 측으로부터 범인 그룹 간부가 인도되어, 6월 14일에 일본인 유학생은 석방되었다.[106]
; 북한에 의한 핵 개발
:수상 취임 후의 CNN으로부터의 인터뷰에서, 핵 개발을 진행하는 북한에 대해 "근처에 위협이 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한은 자립해 가는 것은 어렵다"[107]고 지적했다. 더욱이, 북한의 미래에 대해 "지금 상태로는 언젠가는 소멸해 버린다"[107]고 엄격한 평가를 내리고, 북한의 핵무기 포기가 필수라는 생각을 표명했다.
; 방위비의 증액
:2011년 2월, 후쿠다는 일본의 방위력에 대해 "조금 더 강화해도 좋다. 그런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 외교력 발휘의 기초가 된다"[108]고 지적하고, 방위력을 강화하도록 호소했다. 특히 강화해야 할 점에 대해서는 "군사력이란 단순히 힘, 무기가 강하면 좋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 전에 정보력이 필요하고, 일본은 그 면에서 매우 잘 되어 있지 않다"[108]고 지적하고, 정보 수집에 관한 분야에 대해 더욱 중점적으로 주력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더욱이, 근년의 방위비에 대해 "국내총생산(GDP)의 1%보다 낮고, 이것으로 억제력이 될 것인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108]고 말하고, 방위비 1% 틀 상한에조차 도달하지 않고 있는 점을 문제시하여, 방위비의 증액을 주장했다.
;자원국과의 관계 강화
:마루젠석유 재직 시절부터 쌓아온 인맥을 활용하여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한 BRICS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도모하여 일본의 자원·에너지의 안정적인 확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2008년 5월에 개최된 제4차 아프리카 개발 회의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내각총리대신으로 의장에 취임했다. 그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40명 이상의 수뇌와 개별적으로 회담을 갖고, 희토류 등 자원 확보와 안보리 상임이사국 개혁에 대한 일본 협력을 요청했다.[149] 더 나아가, 아프리카 10개국 위원회와의 수뇌 회담도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실시했다.[150]
;대륙붕 인정 범위 확대
:고이즈미 정권 각료 간담회 자리에서, 국토교통대신 오기 치카게가 대륙붕 조사 체제의 미비를 지적하자, 내각관방장관 후쿠다는 "대륙붕의 획정은 국익과 관련된 중대한 과제이다. 정부를 총동원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다."[151]고 주장하며 관계 부처에 검토 회의 설치를 지시했다. 내각관방장관 퇴임 후에는 "대륙붕 조사 추진 의원 연맹"을 결성하여 오기타를 명예회장으로, 후쿠다는 회장에 취임했다.
:후쿠다 야스오 내각 출범 후에는, 내각 종합해양정책본부에 참여회의를 설치하는 등 기능 강화를 도모했다. 그 자리에서 "대륙붕 조사 추진 의원 연맹 회장이었기 때문에 해양 분야에도 깊은 관심이 있는 바, 이번 참여회의 개최를 기쁘게 생각한다."[152]고 한 뒤 "정부 일체가 되어 해양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가겠다."[153]고 밝히고 해양 자원 권익 확보 추진을 지시했다. 2008년 6월에는 일본의 대륙붕 인정 범위 확대를 국제연합에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이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해역은 종래에는 배타적경제수역 4470000km2에 그쳤으나, 이 신청의 승인으로 새롭게 380000km2(일본 열도 면적에 상당)가 추가되게 되어[154], 코발트 등 희토류 확보가 가능하게 되었다.[155]
전임인 아베 신조와 비교했을 때, 다자간 협조를 중시하는 자세가 강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에 과도한 배려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으며, ‘전방위 사죄 외교’라고 불리기도 한다.[161]
; 새로운 외교 이념의 제창
:2006년 4월 25일, 도쿄에서 열린 강연에서 고(故) 부친인 후쿠다 다케오가 총리 재임 중에 제시한 대(對) 동남아시아 외교의 기본 원칙인 ‘후쿠다 독트린’을 기초로 새로운 대(對) 아시아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표명했다.[162]
:2008년 5월 22일, 국제교류회의 만찬회 연설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일본 정부의 새로운 5가지 외교 이념을 표명했다.[100][101]
# 아세안(ASEAN) 공동체 실현에 대한 단호한 지지
#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보 조약(미일동맹) 강화
# 평화 협력 국가로서 노력
# 지적·세대적 교류 인프라 육성·강화
# 기후변화와의 싸움
; 외교 정책의 입안
:후쿠다는 외교와 경제에서 일본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우려하여, 이오키베 마코토를 회장으로 하는 ‘외교 정책 연구회’를 설치하고,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점유율 저하에 대한 대응을 자문했다.[163] 참고로, 오카모토 유키오, 고이소키 마사오, 기타오카 신이치, 다니노 사쿠타로, 와타나베 오사무 등 고이즈미 정권의 ‘대외 관계 태스크포스’ 멤버의 절반 이상이 외교 정책 연구회에도 참가했다.[164][165]
; 주요국 정상회의
:2008년 한·불 정상회담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국제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여 참가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166]고 말하며, 주요국 정상회의 참가국에 중국과 인도 등 경제 신흥국도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후쿠다는 “국제 사회에 큰 책임을 공유하는 소수에 의한 솔직한 의견 교환의 장이다”[166]라고 말하며, 경제 신흥국의 참가는 아웃리치 회합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보였다.
:2008년 7월 7일부터 개최된 제34회 주요 8개국 정상회의(홋카이도 도야코 정상회의)에서는 의장을 역임했다.
:중국산 냉동 만두 중독 사건에서는 중국 국내에서 일본 미출하 만두에서 일본과 동일한 식중독이 발생하여 7월 초에 전해졌지만, 중국 정부에 대한 요청과 정상회의에 대한 배려로 인해 사실이 1개월 늦게 발표되었다.
; 아시아 외교
:2007년 11월 23일 한국 해양 박람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해양’을 테마로 한 박람회이기 때문에, 일본해 명칭 문제와 독도 문제를 한국 측의 주장을 선전하는 장소가 될 우려가 있지만, 한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전시 내용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는 등의 요구는 하지 않았다.
:2008년 5월,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가맹국이 추진하는 ‘ASEAN 공동체’ 구상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더 나아가, 유럽 연합(EU)에 있는 일본 정부 EU 대표부와 마찬가지로, 장래에는 ASEAN에도 일본 정부 ASEAN 대표부나 ASEAN 담당 대사를 신설하겠다고 표명했다.[100][101]
; 중화민국(대만)
:당시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천수이볜이 ‘대만’ 명의로 유엔 가입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 실시를 표명하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반대를 표명하는 등 중국, 미국, 유럽 각국의 정부는 주민투표 실시에 반대했다.[167][168][169] 그러나, 다른 국가 정부와는 차별화하여, 일본은 ‘독립 반대’라는 표현을 피하고 대만에 일정한 배려를 보이는 입장을 고수했다.[170]
:전 중화민국 총통인 리덩후이와는 부친인 다케오 시대부터 교류가 있었고, 후쿠다 자신도 대만을 방문했을 때 리와 만찬을 하는 등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71] 또한, 고이즈미 정권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을 당시, 중국 공산당이 대만 요인의 방일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가운데, 후쿠다는 대만 외교부장인 젠위신의 입국을 허용하도록 지시하여 2003년 가을 젠의 방일을 실현시켰다고 한다.[172]
:총리 취임 당시, 대만 언론으로부터 일본 정치인으로서는 이례적인 ‘대만을 세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인물’[171]이라고 소개되었으며, 타이베이 경제문화대표처의 파티에도 초대되어 참석했다.[171]
:2007년 12월 28일, 일중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중국 측 통역사가 “후쿠다 총리는 대만 독립에 반대하는 입장을 준수, 엄수해 나갈 것을 표명했다”[170]고 후쿠다의 발언을 왜곡하여 번역했다. 그러나, 그것을 들은 후쿠다는 외무심의관 야부나카 미쓰지에게 자료를 가져오게 하여, 통역의 오역을 현장에서 직접 수정했다.[170]
:2008년 5월, 중국 국민당의 마잉주가 대만의 신임 총통으로 취임하자, 국교 단절 이후 사상 처음으로 일본 정부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173]
; 코소보 지위 문제
:2008년 2월 17일, 코소보 메토히야 자치주의 잠정 정부가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일본 정부는 국가 승인을 할 생각을 표명했다. 코소보의 독립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반대하는 러시아, 중국, 세르비아 등으로 양분되어, EU(유럽연합)나 유엔의 기관 승인은 보류되고 있다. 따라서, 승인 시기는 정세를 살펴 신중하게 검토할 생각을 보였다. 3월 5일, 후쿠다는 코소보와 마찬가지로 발칸 반도에 위치한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스티페 메시치 등과 회담하고, 양국 모두 코소보를 국가 승인할 의향을 확인했다. 그 위에, 독립 선언 1개월 후인 3월 18일, 코소보의 독립 승인을 공식적으로 각의 결정했다.
;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자민당 총재 선거 직전에 행해진 2007년 9월 21일 도쿄 내흥정의 일본 프레스 센터 빌딩에서의 아소 다로와의 공개 토론회에서는, “납치 피해자를 하루빨리 귀국시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도한 요구를 받을 수는 없다”, “협상은 대화 일변도가 아니고, 상황에 따라 대화와 압력을 활용하여 협상한다”, “상대방과 대화할 분위기가 전혀 없고, 대화가 단절되어 있는 경우에는 압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등의 견해를 보였다.[174]
:주변 국가들에게도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에 대한 협력을 요청했다. 일미 정상회담에서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논의를 나누었고,[175] 일베 정상회담에서는 후쿠다가 응우옌민찌엣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일본인 납치 문제·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해 베트남에서 북한에 대한働きかけ를 요청했으며,[176] 일로 정상회담에서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요청하여 협력을 얻었다.[177]
:2008년 7월 6일의 일미 정상회담에서는 납치 피해자의 어머니의 저서[178]의 영역판[179]을 부시에게 증정하고 “비핵화와 납치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 계속 미국과 협력하고 싶다”[180]고 주장하며 협력을 요청했고, 부시로부터 “나는 납치 문제를 결코 잊지 않겠다. 신속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계속 긴밀히 연계해 나가겠다”[180]는 확답을 얻었다. 또한, 후쿠다는 북한에 대한 엄정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부시와 북한에 대한 검증 실시로 핵 개발 포기를 가져오는 것에 합의했다.[180] 다음날부터 개최된 제34회 주요 8개국 정상회의에서도 일본인 납치 문제를 제기하고 각국 정상으로부터 일본에 대한 지지를 얻었으며,[181] 일본인 납치 문제에 관한 북한에 대한 비난이 정상회의의 정상 선언에 사상 최초로 담겼다.[182]
; 미얀마 군사 정권
:미얀마에서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1000만달러 규모의 긴급 지원을 표명하고, 후쿠다는 국제 긴급 구호대 파견 등 인적 지원도 표명했다.[183][184] 그러나, 미얀마의 군사 정권은 각국으로부터의 인적 지원 제안을 거부하는 동시에, 국민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원활한 구호 활동이 실시되고 있다고 어필했다.[185] 이 군사 정권의 대응에 대해 후쿠다는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186]고 엄하게 지적하고 “만약 (사망자가) 10만 명의 재해라면, 국제 사회로서 방치할 수 없다”[186]고 말한 뒤, 유엔의 틀을 활용한 적극 개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국가평화발전평의회 의장인 탄 슈웨에게 일본이 긴급 의료팀을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하고, 다른 국가나 국제 기관의 지원 요원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187]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08년 4월 2일, 티베트를 진압한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국제적으로 고조된 것에 대해, 후쿠다는 “인권과 관련된 일이 있다면,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한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자 “중국이 노력하고 있는 중에 참가한다든가 하지 않는다든가 말하는 것은 안 된다”고 발언하고, 그 후, 개막식에 참석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릴레이에서 각국에서의 항의 행동으로부터 릴레이 주자를 보호하고 있는 ‘성화 방위대’에 대해, 일본 정부 및 경찰청은 ‘성화 방위대’에 의한 경찰권 행사를 거부할 생각을 표명했다. 이즈미 신야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은 “각국의 보도에서는 법 집행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만, 그런 행동을 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188]고 지적하고, 마치무라 노부타카 내각관방장관도 “정체불명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싶다는 이야기가 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 만약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해도,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법치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경찰 등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치안 상태는 아니다”[189]라고 말했다. 후쿠다 야스오도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에게 “일본 경찰이 확실히 지킨다”[190]고 강조하며, ‘성화 방위대’의 경호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보였다. 더 나아가, 티베트 문제에 대해 중국 측의 주장을 말하는 양에게, 후쿠다는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191]고 반론했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인의 스포츠 관전 시의 태도가 나쁘다는 것이 문제시되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며, 후쿠다는 “많은 중국 사람들이 중국의 응원만 한다”3. 2. 국내 정책 2008년 6월 11일, 일본 국회에서 야당이 장악한 상원은 후쿠다 야스오에 대한 비구속성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등 야당이 제출한 이 안건은 일본 전후 헌법 하에서 총리에 대한 최초의 불신임안이었다. G8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 안건은 인기 없는 의료 계획 등 국내 문제에 대한 후쿠다의 대응을 비판하며 조기 총선 또는 사퇴를 촉구했다.[12][13][14] 6월 12일, 하원 여당 연합은 신임 투표를 통과시켜 불신임에 맞섰다.[15]
2008년 9월 1일, 후쿠다는 정치 과정의 원활한 흐름 개선을 이유로 사임을 발표했다. 이는 1년 전 아베 신조의 갑작스러운 사임과 유사했다. 후쿠다는 아베의 사임은 건강 문제였지만, 자신의 사임은 자민당과 야당이 장악한 중의원 간 교착 상태로 인한 입법 및 정치 과정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의도라고 밝혔다.[16]
이 사임으로 자민당 총재 선거가 치러졌다. 아소 다로가 후쿠다의 유력한 후임으로 여겨졌고, 일주일 후 당선되었다.[17] 후쿠다의 인기는 고령자를 위한 논란이 된 의료 계획으로 인해 한때 지지율이 30%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오늘, 저는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국회 회기 대응을 위해 새로운 라인업이 필요합니다. 민주당이 모든 법안을 지연시키려 했기 때문에 정책 시행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일본 국민을 위해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18][19]
아소 다로는 9월 22일 후쿠다의 후임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후쿠다와 그의 내각은 2008년 9월 24일 아소 다로가 이끄는 새로운 내각을 위해 전원 사퇴했다. 아소는 같은 날 중의원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20]
후쿠다 취임 초기 몇 달 동안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일본의 인도양 연료 공급 작전의 지위였다.[30] 9.11 테러 이후, 일본 국회는 미군 군사 작전에 참여하는 미군 함정에 연료를 공급할 수 있도록 일본 유조선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후쿠다는 이 작전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는 민주당이 상원에서 다수당이 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다. 몇 달 간의 논쟁과 타협 시도 실패 끝에 상원은 작전 지속 법안을 부결했다. 그러나 후쿠다는 자민당이 하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것을 이용하여 법안을 통과시켰다.[31]
후쿠다 내각은 2007년 9월 26일에 출범했으며,[32] 아베 신조 내각과 거의 동일했다.[33] 내각 출범 후 지지율은 꾸준히 하락했다. 2008년 4월 말, 내각 불신임율은 60%, 지지율은 25%였다. 후쿠다는 2008년 8월 1일에 내각 개편을 단행했다.[34]
관방장관 | 마치무라 노부타카 |
---|---|
총무대신 | 마스다 히로야 |
법무대신 | 하토야마 쿠니오 |
외무대신 | 고무라 마사히코 |
재무대신 | 누카가 후쿠시로 |
문부과학대신 | 도카이 기사부로 |
후생노동대신 | 마스조 요이치 |
농림수산대신 |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
경제산업대신 | 아마리 아키라 |
국토교통대신 | 후유시바 테쓰조 |
환경대신 | 카모시타 이치로 |
방위대신 | 이시바 시게루 |
공안위원장, 재해방지 담당 | 이즈미 신야 |
경제정책 담당 | 오타 히로코 |
금융 서비스, 행정개혁 담당 | 와타나베 요시미 |
오키나와 및 북방영토 담당, 기술정책 담당, 규제개혁 담당 | 키시다 후미오 |
인구, 청소년 및 성평등 담당 | 카미카와 요코 |
2007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는 “희망과 안심의 나라 만들기”, “개혁을 진행하고, 그 앞에 목표하는 사회”라는 기본 이념을 제시했다.[90][91] “자립과 공생”은 10년 전부터 신생당, 구 민주당의 이념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민주당 대표였던 오자와 이치로는 “오랫동안 내가 사용해왔던 말을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92]
후쿠다는 2007년 10월 21일 와세다대학 창립 125주년 기념식에서 “자립과 공생”은 오쿠마 시게노부가 125년 전에 이미 생각했던 것이라고 발언했지만, 오자와에 대한 반박 의도가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 자립과 공생의 사회
- 스톡형(지속 가능) 사회
- 남녀 공동 참여 사회
; 비핵삼원칙 재검토
: 2002년 5월 31일, 내각관방장관 재임 중, 일본은 핵무기 보유가 가능하지만 정책 판단으로 보유하지 않는다는 정부 답변을 했다. 야당은 "비핵삼원칙 재검토"를 언급했다는 보도를 후쿠다의 발언이라고 주장했다.[93] 후쿠다는 국회에서 "각 시대 상황에 따라 안보 문제는 국제 정세 등을 고려한 다양한 국민적 논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미래에 정부로서 비핵삼원칙을 재검토할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것은 자신의 본심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94]
; 자위대 인도양 파병
: 후쿠다는 자위대 인도양 파병에 긍정적이었으며, 내각관방장관 재임 시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제정을 주도했다. 2007년 9월, 동법 연장에 대해 "신법을 고려하는 것은 불가피하다."[96]라고 생각했지만, 최종적으로 테러대책 해상저지활동에 대한 보급지원활동의 실시에 관한 특별조치법(보급지원특조법) 제출을 선택하여, 2008년 1월 11일에 성립시켰다.
; 자위대 이라크 파병
: 후쿠다는 자위대 이라크 파병 정책 입안을 주도하고, 내각관방장관 재임 시 이라크에 있어서의 인도부흥지원활동 및 안전확보지원활동의 실시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라크특조법)을 성립시켰다.
; 방위성 불상사
: 방위성의 불상사가 잇따라 발각되자, 후쿠다는 내각관방에 "방위성 개혁에 관한 유식자 회의"를 설치하여 대책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97] 2007년 11월 28일 자위대 고급 간부 회동에서 후쿠다는 방위성에 의한 영예례나 의장을 거부하고, 강기숙정의 철저를 훈시했다.[99]
; 재정건전화
: 나카가와 히데나오, 아소 다로 등 아베 내각의 경제성장에 의한 세수 증대를 목표로 하는 상승파(上げ潮派)와는 달리, 후쿠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타니가키 게이이치 등이 추진한 “재정재건 중시 정책”을 주장했다. 후쿠다는 “고이즈미 구조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109], 소비세 증세에 대해서는 “소비세를 증세하지 않으면 재정적자는 줄어들지 않는다”고 말했다.[109]
; 기초적 재정수지 흑자화
: 상승파(上げ潮派)에 부정적이며,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지출을 수반하는 'ばらまき' 정책(선심성 정책)은 채택하지 않는다고 했다. 후쿠다는 일본 정부의 2011년도까지 기초적 재정수지 흑자화 목표에 대해 “달성하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연기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110]고 말했다.
; 도로 특정 재원 제도 지침 제시
: 2008년 3월 19일, 후쿠다는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타니가키 게이이치와 공명당 정무조사회장 사이토 테쓰오에게 「도로 특정 재원의 생각」을 제시[111]하고, 일반 재원화를 향한 세제 개정 등 5개 항목 실현을 지시했다.
; 긴급 기자 회견과 「후쿠다 제안」
: 2008년 3월 27일, 후쿠다는 총리대신 관저에서 긴급 기자 회견을 열고, 도로 특정 재원 제도를 전부 폐지하고 2009년도부터 일반 재원화한다고 발표했다.[114]
; 도로 특정 재원 일반 재원화 추진
: 도로 특정 재원 제도의 일반 재원화는 고이즈미 정권의 성역 없는 구조 개혁조차 실현하지 못했고, 역대 정권에서도 단념한 난제였지만[122], 3월 30일 국회 대책 위원장 오시마 리모리가 후쿠다 제안을 공식적인 여당 안으로 표명하고[124], 4월 11일 정부, 자유민주당, 공명당은 2009년도에 도로 특정 재원을 전폐하기로 합의했다.[126] 5월 12일, 후쿠다는 젊은 의원들을 관저에 모아 격려하고, 다음 날 도로 특정 재원 전폐를 각의 결정했다.
; 금융위기 대응
: 고이즈미 정권에서 금융불안 해소를 위해 부실채권 처리가 추진되었고,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한 후쿠다 역시 금융위기 대응 경험을 쌓았다.[128] 2008년 9월 15일 미국 리먼 브라더스 파산 당시, 일본 정부는 신속하게 대응했다.[129]
; 공항법안 외자 규제 조항 삭제
: 2008년, 국토교통성이 공항 운영 회사에 대한 외자 규제를 포함한 공항법 개정안을 제시하자,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 오타 히로코와 와타나베 요시미 등이 규제에 반대하며 국토교통대신 후유시바 테쓰조와 대립했다. 후쿠다는 공항 관련 회사 외자 규제에 신중한 입장이었다.[131]
; 200년 주택 비전
: 당 주택토지조사회 회장 취임 후 2007년 5월 “200년 주택 비전”을 제안했다. 후쿠다는 “30년 정도밖에 견디지 못하는 현재 주택은 토지에만 가치가 남아 투기 대상이 된다”[134]고 지적했다. 총리 취임 후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좋다고 하는 사회와의 결별”[135]을 선언하고, 장수명화를 추진한다고 주장했다.
; 소비자 보호
: 제168회 국회 소신 표명 연설에서 “진정으로 소비자와 생활자의 시각에 선 행정으로 전환”[138]한다고 밝히며 소비자 보호 정책을 중시했다.
; 소비자 행정 일원화
: 2008년 4월 23일, 후쿠다는 “소비자 행정 추진 회의”에서 정부 소비자 행정을 일원화하기 위해 내각부 외청으로 “소비자청”을 신설하고, 시정 권고권을 부여한다고 표명했다.
; 경제 구조 개혁
: 일본 경제에 대해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전환이 필요하다”[147]는 소신을 밝히며, 경제재정자문회의에 “구조 변화와 일본 경제 전문 조사회”를 설치했다.
; 대륙붕 인정 범위 확대
: 고이즈미 정권 각료 간담회에서 국토교통대신 오기타 치카게가 대륙붕 조사 미비를 지적하자, 내각관방장관 후쿠다는 "대륙붕 획정은 국익 관련 중대 과제이다."[151]라고 주장했다.
; 지적재산 전략 수립
: 지적재산권에 대해 후쿠다는 “지재전략은 잘못되면 국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는 중요 정책이다”[156]라고 말했다.
; iPS 세포 개발 지원
: 후쿠다 내각 「지적재산 추진 계획 2008」에는 첨단 의료 분야 지원책도 포함되었다[156][157]. iPS 세포 개발 지원을 제시했다[157].
; 학교 행사 야스쿠니 신사, 고쿠 신사 참배 해금
: 문부과학성은 1949년 사무차관 통달로 학교 행사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금지했다. 후쿠다는 이 통달의 실효를 각의 결정, 각 학교에 야스쿠니 신사, 고쿠 신사 참배를 허용했다.
;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 명기
: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다케시마(시마네현) 영유권 문제를 명기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에게 직접 통고했고, 이명박은 보류를 간청했지만, 후쿠다는 문부과학대신 도카이 키사부로에게 지시, 다케시마 문제를 명기했다.
; 기초연금 국고부담 재원 문제
: 2009년도 기초연금 국고부담률 인상에 따른 2조 5000억 엔 재원 문제에 “소비세 포함 다른 수단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9]
; 한센병 환자 격리 정책 재검토
: 2001년 5월 11일 쿠마모토 지방법원 “나병예방법 위헌 국가배상 청구 소송” 국가 패소 시, 내각관방장관 후쿠다는 항소 포기를 주장했다.
; 사회보장 제도 재검토
: 사회보장국민회의를 내각관방에 설치, 사회보장 제도 재검토를 추진했다.
; 쿨어스 추진 구상 제안
: 2008년 1월 26일,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에서 “쿨어스 추진 구상”을 제안했다. 포스트 교토 의정서 체제 구축, 환경 기술 이전, 개발도상국 지원을 통한 국제 환경 협력, 혁신 기술 개발, 저탄소 사회 전환을 위한 혁신 세 가지를 제안했다.
; 저탄소 사회 추진
: 2008년 4월 17일 주요 8개국 비즈니스 정상회담에서 저탄소 사회 추진을 표명했다.
; “후쿠다 비전” 제안
: 2008년 6월 9일, 후쿠다는 “미래 세대를 위한 저탄소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202]며, “저탄소 사회·일본”을 목표로 한 지구온난화 대책을 발표했다.[203]
; 2008년 이와테·미야기 내륙 지진
: 2008년 6월 14일 오전 8시 43분, 이와테현 내륙 남부 진원 이와테·미야기 내륙 지진 발생. 후쿠다는 피해 상황 파악, 구조에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했고[206], 7분 만에 대응했다.
; 팬데믹 방지
: 2008년 5월 연설에서 "아시아 방재·방역 네트워크"[100]를 제창, 아시아 전체 방재·방역 체제 구축을 호소했다.
; 긴급 원조대 창설
: 2008년 5월 "방재 협력 외교"[100] 표명, 아시아 각국 자연재해에 국제 긴급 원조대 파견 제도 제창.[101]
; 식량 위기 대응
: 2008년, 쌀 부족 예상 필리핀 긴급 원조 요청에 일본 정부는 수입 의무미 용도 변경, 필리핀에 정부 비축미 원조 결정.[214]
; 헌법
: 「일본국헌법」 전문은 평화주의 정신을 추진했지만, 자위 개념이 희박해지는 결함을 안고 있어 전문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216]
; 정치자금
: 아베 신조 정치자금수지보고서 "1엔 이상" 영수증 첨부 의무화 방침에 "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이 타당한지"라고 말했다.
; 내각인사국 제도 반대
: 아베 신조 내각 결정 내각인사국에 "정치인 인사 불가", "내각인사국은 최대 실패"라며 반대.[217][218]
; 공문서 관리 체제 정비
: 독립행정법인국립공문서관 정비, 확충을 주장, "공문서관 추진 의원 간담회" 대표 취임.
; 동영상 공유 서비스 활용
: 당 홍보 활동으로 동영상 공유 서비스 도입. 2007년 12월 18일 "유튜브"(일본판)에 자유민주당 공식 채널 "[https://www.youtube.com/user/LDPchannel LDP channel]" 개설.[223][224]
; 독립행정법인·공익법인 개혁
: 도로 특정 재원 부적절 지출, 국토교통성 출신 공익법인 낙하산 인사 문제화에 후쿠다는 "심하다. 분노했다"[226]고 격노.
;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에 국민 감정은 "찬성"에 가깝고, "찬성" 당론 민주당 대항 위해 자민당 주도 결착 필요하다고 언급.[229]
; 이민 수용 반대
: 타국 이민 수용에 부정적.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이민 급증, 사회 혼란은 피해야 한다"[231]고 말했다.
4. 논란 및 비판
2008년 6월 11일, 일본 의회에서 야당이 주도하는 상원은 후쿠다 야스오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이 안건은 민주당 등 야당이 제출한 것으로, 일본 전후 헌법 하에서 총리에 대한 최초의 불신임안이었다.[12][13][14] G8 정상회의를 앞두고 제출된 이 안건은 인기 없는 의료 계획 등 국내 문제에 대한 후쿠다 총리의 대응을 비판하며 조기 총선이나 사퇴를 요구했다.[12][13][14]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관방장관이었던 후쿠다는 2003년 6월 기자들과의 비공개 대화에서 와세다 대학의 슈퍼 프리 동아리 남성 회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에 대해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26] 슈칸 분슌의 기사에 따르면, 후쿠다는 "자신에게 하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이 있다. 그런 외모를 가진 여성들이 잘못이다. 남자는 검은 표범과 같으니까."라고 말했다.[27][28] 이에 대해 후쿠다 측은 슈칸 분슌이 자신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주장하며 성폭행을 옹호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하고, 이후 국회 위원회에서 성폭행은 "범죄 행위이자 극악무도한 범죄"라고 말했다.[28][29]
; 주일미군에 의한 범죄
2008년 2월 10일 오키나와현에서 발생한 주일미군 해병대 이등병에 의한 여중생 강간 사건에 대해, 후쿠다는 “우리나라의 법과 증거에 근거하여 적절하게 대처해 나가겠다”고 말하면서, “과거에 몇 번이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발생한 것은 정말 중대한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미국 측에 항의하고 개선을 요구할 생각을 밝혔다.[251] 2008년 2월 27일, 총리대신 관저를 방문한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매우 유감스럽고 죄송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재발 방지에 최대한 노력하고 싶다.”[252]라고 말하고, 후쿠다에게 사과의 뜻을 표했다.
; 연금 기록 문제
2007년 연금 기록 문제가 정치 문제로 확대되자, 사회보험청은 공중에 뜬 연금 기록을 해소하기 위해 해당자 불명의 연금 기록 5000만 건의 대조 작업을 시작했다. 2008년 3월 말까지 소유주가 밝혀지는 것은 1000만 명 정도에 그치고, 이름을 매칭하기 어려운 기록이 1975만 건에 달한다는 추계치가 발표되었다.[253]
전 총리 아베 신조는 2007년 5월 국회 답변에서 “3000만 명의 분들과 이 2880만 건을 1년 안에 대조하겠습니다.”[254]라고 주장하고, “1년 안에 우리는 모든 것을 대조하겠다는 것을 약속드립니다.”[254]라고 명확히 말했다. 또한,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의 연설에서 아베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든 기록을 확인하고, 성실하게 보험료를 낸 사람의 수급을 보장하겠다.”[255]라고 말하고,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중간 보고의 추계에 근거하면 아베의 공약 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이기 때문에, 정부·자민당에 대한 공약 위반이라는 비판이 높아지고, 후쿠다가 총리로서 사과하는 소동이 되었다.[256] 후쿠다는 “(당시) 아베 총리는 상당히 제대로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257]라고 발언하고, 아베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가 총리로서 할 수 없었던 일
후쿠다 야스오가 총리가 되어 일본 최초의 부자 총리가 탄생했지만, 아버지 다케오가 총리로서 할 수 없었던 일로 주목되는 것은 서밋 의장과 해산 총선거였다. 아버지 다케오는 1979년 일본 총리로서 서밋의 의장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정적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패배하고, 서밋 의장도 해산 총선거도 할 수 없이 총리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아들 야스오는 2008년 7월에 서밋의 의장을 맡아 아버지의 염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해산 총선거는 할 수 없이 2008년 9월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북한에 의한 납치 문제
2002년, 방북 전에 고이즈미 총리와의 면회를 요구한 납치 피해자 가족에게, 후쿠다는 “조용한 상태로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가족과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만나지 않았다. 총리 대신 후쿠다가 납치 피해자 가족과 만났을 때, 마스모토 테루아키는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258]
납치 피해자 가족 중 한 명인 하시지마 토오루에 따르면, 2002년 9월, 납치 피해자의 안부에 대해 관방장관으로서 후쿠다가 가족에 대해 보고했을 때, 하시지마 토오루의 어머니가 생존으로 여겨지는 가족과 사망으로 여겨지는 가족을 따로따로 하지 말고, 같은 장소에서 보고해 달라고 호소하자, “조용히 들어. 당신들의 가족은 살아 있으니까”라고, 양팔로 누르는 듯한 몸짓을 했다고 한다. 하시지마는 그 당시 일본 정부는 안부에 대해 어떤 확인도 근거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후쿠다가 사망 여부 정보를 단정적으로 말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하고 있다.[260]
2007년 9월 21일의 아소 다로와의 공개 토론회에서, 후쿠다는 “외무성의 연락에 따르면 이렇습니다라고 명확히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단정적으로 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설명했다.[261]
일시 귀국 약속으로 납치 피해자가 귀국했을 때, 아베 신조 관방 부장관(당시) 등의 북한에는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다나카 히토시 등과 함께 북한에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2007년 9월 21일의 아소 다로와의 공개 토론회에서는, 후쿠다는 “그때 저는,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북한에 돌려보낸다는 약속을 어겨도 괜찮을지 외무성에 자주 물었습니다”, “최종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귀국한 본인에게 의향을 확인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고, (일본에 남는다는) 확인이 되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261]
납치 문제에 대한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국장(당시) 다나카 히토시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나카는 잘했다. 퍼펙트다”라고 평가했다.[258]
;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일을, 후쿠다는 전 주중 대사 다니노 사쿠타로에게 상담하고, 고이즈미의 10월 방중을 중국이 받아들이는 것을 대가로, 8월 18일 참배를 향해 움직였다고 한다.[264]
; 강간에 관한 발언
2003년 6월 26일, 여대생이 집단으로 강간당한 와세다 대학의 슈퍼 프리 사건에 대해, 후쿠다는 “그런 옷차림을 한 쪽이 나쁘다. 남자는 흑표범이니까”, “여성에게도 ‘해줘’라고 하는, 있는 거 아니냐”고 오프더레코드로 발언했다고 보도되고[265], 여성의 인권에 반하는 발언이라고 비난받았다. 후쿠다는, 같은 해 7월 3일의 참의원 내각 위원회에서, “강간은 범죄 행위이며, 그것도 흉악 범죄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지금까지 강간을 옹호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 같은 발언은 하지 않았고, 제 진의와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267]
; 연금 미납
2004년 4월 27일, 각료의 연금 보험료 납부 상황에 대해 “공개하라고 국회에서 결정한다면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개인 정보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공개를 다시 거부했다. 3명의 각료가 미납을 인정한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공개된 것이며, 원래라면 이것은 지켜져야 할 개인 정보다”라고 말했다. 후쿠다에게 “이상하지 않습니까”라고 몰아붙였는데 대해, “당신이 더 이상하다”고 반발했다.[268] 같은 해 5월, 주간문춘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도 연 5년 8개월의 미가입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했다.[269]
; 정치와 돈을 둘러싼 문제
2007년 9월, 후쿠다 총리가 대표를 맡는 “자민당 군마현 제4선거구 지부”나 자금 관리 단체 “치요다 경제 담화회” 등의 정치 자금 수지 보고서에 첨부된 영수증 사본의 수취인이 100개 이상 위조되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후쿠다는 “경리 담당자가 영수증을 다시 받는 수고를 아꼈다”, “최고 책임자로서는, ‘창피한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등이라고 설명했다.[270]
후쿠다가 대표를 맡고 있는 정당 지부가 1996년과 2003년에, 외국인이나 외국인이 주식의 과반수를 소유하는 기업으로부터 헌금을 받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정치 자금 규정법에 위반하여, 조선 국적의 회장과 한국 국적의 친족이 전 주식을 소유하는 군마현 다카사키시의 파친코점을 경영하는 기업으로부터 총 20만엔의 기부를 받았다는 것이 발각되었다.[270]
; 수상 사임 표명 기자 회견에서의 에피소드
2008년 9월 1일의 사퇴 표명 기자 회견에서, 중국신문사의 도멘 마사카즈 기자가 "일반적으로, 총리의 회견이 국민에게는 남의 일처럼 들린다는 얘기가 자주 들려왔습니다. 오늘의 사퇴 회견을 들어도, 역시 솔직히 그렇게 인상을 받습니다" [284]라고 말하자, 후쿠다는 "남의 일처럼이라고 당신은 말했지만, 나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신과 다릅니다'''. 그런 점도 함께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284]라며 감정을 드러내며 맞받았다.
"당신과 다릅니다"는, 『주간문춘』의 2008년 12월 4일호에서 발표된, 독자 1000명으로부터의 설문 조사 집계에 의한 2008년도의 『주간문춘판·유행어 대상』에서도, 262표를 획득하여 1위에 선출되었다.[288]
5. 평가
후쿠다 야스오는 냉정하고 차분한 외모와는 달리, 실제로는 순간적으로 욱하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관방장관 시절 부하 직원이었던 아베 신조에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며 책상을 발로 차며 질책했다는 일화가 있다.[240] 또한, 다이니타 아츠시에게 "다이니타 군, 정치는 남자의 로망이다. 파이어!"[241]라고 말하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적이었던 간 나오토는 후쿠다에 대해 "비스듬히 기대고 있지만 진흙을 뒤집어써도 해낸다는 면이 있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후쿠다 관방장관은 나카소네 총리・고토다 관방장관을 떠올리게 한다"[242]고 평가했다. 각본가 미타니 코키는 후쿠다의 말투에 대해 "분명히 재미있는 말을 하려는 의지가 엿보이고, 게다가 확실히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243]고 평가했으며, 쓰보우치 유조는 "후쿠다 씨의 블랙 유머를 좋아했다"[244]고 말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드물게 외교에 능통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탄탄한 지역 기반 덕분에 선거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나카 마키코 외무상 시절 외교가 정체되었을 때, 관방장관으로서 외무성을 직접 관할하여 외교적 파탄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에서 함께 각료를 역임한 다케나카 헤이조는 후쿠다 총리에 대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꽤 큰 결단을 내리고 있다"[245]고 평가하며, 후쿠다가 개혁에 소극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쿠다 정권의 개혁 노력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정책마케팅』에 문제가 있다"[245]고 평가했다. 이토 타츠야는 후쿠다가 "공을 독차지하려 하지 않고 모두에게 주려고 한다"[246]고 평가하며, "눈에 띄려고 하지 않는 정치가는 드물다"[246]고 말했다. 후쿠다 가즈야는 후쿠다가 공문서 관리 체제 강화를 추진한 것에 대해 "50년 후의 연구자는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247]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언어학자 히가시 데루지는 후쿠다가 정보 전달에는 능숙하지만, 감정 전달과 공감대 형성에는 서투른 인물이라고 지적했다.[248] 또한, 후쿠다의 발언 스타일이 "남의 일처럼 말하는 태도"라고 평가받는 이유에 대해 "개인의 강한 애착,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감정, 적극적인 태도 등이 드러나지 않는" 특징 때문이라고 분석했다.[250]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39회 총선거 | 군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88,445 | 20.3 | 1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40회 총선거 | 군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83,501 | 21.2 | 2 | 당선 | 중선거구제 |
제41회 총선거 | 군마현 제4구 | 자유민주당 | 73,674 | 45.99 | 1 | 당선 | |
제42회 총선거 | 군마현 제4구 | 자유민주당 | 94,517 | 57.68 | 1 | 당선 | |
제43회 총선거 | 군마현 제4구 | 자유민주당 | 98,903 | 62.15 | 1 | 당선 | |
제44회 총선거 | 군마현 제4구 | 자유민주당 | 118,517 | 62.81 | 1 | 당선 | |
제45회 총선거 | 군마현 제4구 | 자유민주당 | 103,852 | 51.91 | 1 | 당선 |
참조
[1]
뉴스
Fukuda Challenges Aso in Race to Be Prime Minister
https://www.bloomber[...]
Bloomberg.com
2007-09-14
[2]
뉴스
Get someone else,
http://www.economist[...]
The Economist
2008-09-01
[3]
서적
Struggle, Strife, and Stalemate: Struggle, Strife, and Stalemate: Yasuo Fukuda and Present- Yasuo Fukuda and Present-day Japanese Politics
Institute for Security and Development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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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lawmakers seek to replace war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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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s finance chief not to run for ruling party pres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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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er FM Aso acknowledges probable defeat in Japan's leadership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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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kuda Chosen to Replace Abe as Japan's Prime Min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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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P leader Fukuda elected prime min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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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s new leadership sworn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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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PM humiliated by parli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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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sure motion offered against Fuk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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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o Aso confirmed as Japan's new Prime Min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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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experience points to golden opportunity for China in US trad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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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kuda denies making remarks defending alleged gang rap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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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kuda elected prime minister in Diet face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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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prime minister reshuffles 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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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Mesić meets Japanese Emperor Akih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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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Croatia Summit M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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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e Minister of Japan and His 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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菅官房長官、7日に在職歴代1位=1290日、福田康夫氏抜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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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2代 福田 康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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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定感に定評 福田氏 プロフィー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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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200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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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康夫元首相 南京記念館の訪問「展示内容の修正評価」「鳩山元首相のときとは展示物違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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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2018-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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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第22代自民党総裁は福田氏!史上初の親子2代首相が誕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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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ンケイスポーツ
200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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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氏旧友「クールな捕手」発言心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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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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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内閣メールマガジン 第9号 〜 (2007/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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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内閣広報室
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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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総裁に福田氏 「和」で難局に挑む 調整型“サラリーマン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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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jiSankei Business i
200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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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影」の人、表舞台に 「本来は相当な決断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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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
200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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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内閣メールマガジン第3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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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内閣メールマガジン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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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福田康夫』20のナゾ
週刊新潮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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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自民党新総裁:遅咲き、親子宰相/時を読み、頂点に(その2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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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
200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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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KY総理のキャラ分析
Voice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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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沖縄相経験者では初/検定問題対応に注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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沖縄タイムス
200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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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康夫官房長官の談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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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田五月ホームページ
200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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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氏語録「私は弁明長官」「私は捕手。絶対に受け止め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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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200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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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氏が不出馬、安倍氏優位、自民総裁選-麻生、谷垣氏らの対応焦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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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ルームバーグ
202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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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新政権を待ち受ける「悪事」の数々
読売ウィークリー
20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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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自民総裁選:福田氏が圧勝の勢い 麻生派除く8派が支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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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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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改造舞台裏――参院の意向通らず/麻生氏、存在感示す
読売新聞東京本社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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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副大臣に元閣僚2人――首相、異例の介入――『実行力』に重点
日本経済新聞社
200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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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首相、退陣を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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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200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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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C - Me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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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 Action Cou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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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ウジでOBサミット――福田前首相ら世界経済危機を討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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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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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TICAD閣僚級フォローアップ会合開会式 福田特派大使挨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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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200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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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福田総理特使のアラブ首長国連邦、オマーン訪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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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200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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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外交:福田前首相を特使に - 毎日jp(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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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200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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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両陛下、カナダに向け出発 日系人と懇談、ハワイへも - 47NEWS(よんなな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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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国新聞ネット
200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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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康夫氏がボアオ・アジア・フォーラム新理事長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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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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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財団法人アジア人口・開発協会役員名簿(理事・監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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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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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国連人口賞:アジア議員フォーラムが受賞 - 毎日jp(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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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201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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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元首相らの団体に国連人口賞 立法支援活動が評価 - 47NEWS(よんなな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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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国新聞ネット
201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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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防衛大学校平成22年度(第58回)開校記念祭観閲式学校長式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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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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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首相が福田元首相と会談、APEC助言求め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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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201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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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菅首相:APEC開催、福田氏が助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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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201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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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菅首相 福田元首相と意見交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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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放送協会
201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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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元首相と菅首相が会談 APEC助言請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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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新聞社
201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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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首相、福田氏にAPECで助言求め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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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テレ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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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菅総理に福田元総理が指南 APEC首脳会合前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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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レビ朝日
201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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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菅首相、首相公邸に自民・福田元首相を招きおよそ40分間会談――APEC首脳会議で助言求め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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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ジニュースネットワーク
201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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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康夫元首相:次期衆院選不出馬を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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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
201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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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康夫氏「今まで不毛な議論を続けて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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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201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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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達夫氏、支部長就任へ 自民県連 4区党員大会で承認 群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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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20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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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元首相の長男、群馬4区支部長に…満場一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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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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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事異動
国立印刷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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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元首相、極秘に訪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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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ョージ・H・W・ブッシュ第41代米国大統領の国葬への福田総理特使参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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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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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鰲亞洲論壇產生新一屆理事會 潘基文當選理事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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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島民友
202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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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울려퍼진 아리랑…한·일, 문화로 한발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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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康夫元首相「良くやっている」安倍晋三首相を評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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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康夫公式ウェブサイト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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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立と共生、僕の言葉」 福田氏公約に小沢氏が皮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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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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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54回国会 衆議院 武力攻撃事態への対処に関する特別委員会14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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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祥事さばき『影の外相』――外交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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給油活動継続へ新法案提出も、福田・麻生両氏が一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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防衛省:不祥事続発で改革策検討へ 社保庁以来、官邸に有識者会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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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200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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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首相が栄誉礼を拒否=防衛省不祥事受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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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事通信社
200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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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期待かみしめ、範示せ」=福田首相が自衛隊幹部に訓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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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事通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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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洋が「内海」となる日へ―「共に歩む」未来のアジアに5つの約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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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 内閣広報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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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ジアに防災・防疫網――首相提唱新型インフルに備え――太平洋を『内海』に
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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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Leaks unveils Japanese spy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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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政府、情報機関を準備か 豪紙入手の米外交公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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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で戦後初となる対外情報機関が設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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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首相とイラン大統領、核開発めぐり応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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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社
200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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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법인 유괴 해결에 고충과 속셈――파키스탄에 협력 요청――일본에 '빚' 고립 탈출 노림
일본경제신문
200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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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북한, 핵 보유 계속한다면 소멸'――후쿠다 수상, 미 TV에 언급
산케이신문
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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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전 수상, 방위력 강화의 필요 지적 「GDP의 1%보다 낮다. 억제력이 될까」 - MSN 산케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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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세 인상에 언급, 고이즈미 구조개혁의 방향성으로=후쿠다 전 관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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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재건 목표를 고수, 황실 전범 개정은 논의 필요…후쿠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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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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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재원――수상 '전액 일반 재원화도'――민주와 협의―법안 수정 양보
요미우리 신문
200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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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세제 법안 수정――주내에도 협의 호소――민주 '근본적으로 생각 다름'
요미우리 신문
200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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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재원화를 여당 합의――도로 재원――민주와 협의 돌입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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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특정 재원을 전액 일반 재원화 수상 표명, 21년도부터」정치도―정국 뉴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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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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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특정 재원:09년도부터의 일반 재원화를 표명 후쿠다 수상 - 매일 jp(매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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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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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재원 긴급 회견――고독한 결단 수상 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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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린 명동:다원 중계 갑작스러운 수상 회견 뜻밖의 소식, 자민당 대혼란 - 매일 jp(매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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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신문
200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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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재원 수상 신방침으로 여당에 큰 충격 」정치도―정국 뉴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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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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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특정 재원:수상의 「일반화」언명, 자민당 도로파에 불쾌감 - 매일 jp(매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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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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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 타로 블로그
200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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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잠정 세율 재의결 6파벌 발걸음――자민 일반 재원화 '담보' 소리――TV 출연·거리 연설 민주는 어필 분주
아사히 신문
200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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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수상 신제안 다음은 민주당이 다가서는 차례다 - 매일 jp(매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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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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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의 결단―오자와 대표가 응하는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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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특정 재원의 수상 제안, 정식으로 여당 안으로 야당에 제시―정치―YOMIURI ONLINE(요미우리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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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특정 재원:관방장관 등 5각료가 구체화 협의 수상 신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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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 '도로' 09년도 일반 재원화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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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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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재원화, 할 수 없는 당에 내일은 없다'――수상, 젊은 세대에게 결의――재가결에서의 반란 '당내, 문제없다'
일본경제신문
200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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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리먼 파산·사고미 문제…――'정치 공백'을 직격――위기 대응, 정부 추격――총재 선거에서도 논점으로
일본경제신문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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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금융청, 휴일 반납으로 대응――생보 '파탄 이렇게 빨리…'
일본경제신문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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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정부·일은 환율 공조 개입도 전망――리먼의 거래 내용 금융청, 상세 파악
일본경제신문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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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정비법 개정안:외자 규제 삭제는 「고이즈미 개혁」파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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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신문
2008-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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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외자 규제 보류에 공명 불쾌감 「얕보고 있는 건가」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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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
200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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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의 외자 규제의 보류는 대단히 좋다=와타나베 담당상| 비즈니스|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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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정태 납시――소박한 후쿠다류――그것은 '지루함'인가 '안정'인가
아사히 신문
200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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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간이 「200년 주택」 정부·차기 통상 국회에서 법안 제출―(2/2페이지) - MSN 산케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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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디지털
200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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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간이 「200년 주택」 정부·차기 통상 국회에서 법안 제출―(1/2페이지) - MSN 산케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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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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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주택」의 보급 촉진/장기 우량 주택법이 성립―시코쿠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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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회 국회에 있어서 후쿠다 내각 총리대신 소신 표명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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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관방 내각 홍보실
200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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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중시로 전환을」 수상, 전 정책 재검토 지시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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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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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청 정책 점검 「소비자의 눈으로」 수상, 국민 생활 심의에 요청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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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民生活センターの在り方等に関する検討会最終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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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府国民生活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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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民生活センター:内閣府が機能充実を検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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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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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国民生活センター統合せず、機能強化へ…政府決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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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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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首相が「消費者庁」創設を表明」政治も‐政局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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消費者庁を創設、09年度から…首相が正式に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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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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消費者庁法が成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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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相じわり改革色――株下落人事でやる気PR――『小泉回帰』自民内に反発
朝日新聞東京本社
200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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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前川リポート:「平成版」作成に着手 財界人ら11人議論--専門調査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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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200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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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首相『マラソン会談』完走――アフリカ諸国首脳――常任理入り支持あいまいな回答
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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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首相マラソン会談へ、3日間で17時間…アフリカ開発会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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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200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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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大陸棚は日本列島の1.7倍――権益確保へ調査強化
朝日新聞東京本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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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第1回総合海洋政策本部参与会議議事概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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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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総合海洋政策本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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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本全土分」の大陸棚申請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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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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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大陸棚の範囲延長申請へ
日本経済新聞社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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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iPS細胞研究支援――政府の『知財計画2008』決定
http://www.nikkei.co[...]
日本経済新聞社
200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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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著作権制限年度内に結論――映像などネット流通促進で政府知財計画――海賊版対策を強化
日本経済新聞社
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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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内閣衆質一六九第三八〇号
https://www.shugi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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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節目でみせた『決断力』――官房長官
朝日新聞東京本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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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霞ヶ関半世紀
佐賀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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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全方位”土下座外交 与党からも批判噴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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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ザ!
2008-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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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Sankeiweb
200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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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首相、日本の存在感の薄れ懸念 外交政策勉強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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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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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21世紀日本外交の基本戦略―新たな時代、新たなビジョン、新たな外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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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内閣広報室
200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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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外交政策勉強会-メンバ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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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仏首脳会談 首相「サミットは小人数の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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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2008-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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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米国務長官 台湾の住民投票に反対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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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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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米は『独立』沈静化期待
http://www.tokyo-np.[...]
中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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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明らかな犯罪活動だ」米中電話会談で胡錦濤主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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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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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中首脳会談 「誤訳」で福田首相の顔色一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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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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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康夫『台湾外相』極秘入国を認めていた!
文藝春秋
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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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福田康夫『台湾外相』極秘入国を認めていた!
文藝春秋
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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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本政府、台湾・馬総統に就任祝賀メッセ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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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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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公開討論会 守備固めの福田 攻撃不発の麻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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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米首脳会談:ブッシュ大統領「拉致忘れぬ」 北朝鮮核放棄へ連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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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首相:日本人拉致問題で越国家主席に協力要請 - 毎日jp(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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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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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拉致問題進展へ 露大統領「協力」 首脳会談(産経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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めぐみ、お母さんがきっと助けてあげ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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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North Korea Kidnapped My Daughter
Ver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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対北朝鮮日米、核・拉致で連携――首脳会談申告協力に検証
日本経済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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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イランに包囲網――首脳宣言で『核兵器削減』中国にも圧力――拉致問題で日本を支持
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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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8 Hokkaido Toyako Summit Leaders Decla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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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政府、ミャンマーに1000万ドル追加支援へ 写真3枚 国際ニュース : AFPBB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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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7-19:34――ミャンマーに人的派遣も=福田首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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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ャンマー:軍政、硬直姿勢変えず 外国の救援要員を拒否 - 毎日jp(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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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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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首相怒った!ミャンマー政府の対応「理解できない」」政治も‐政局ニュース:イ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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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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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際援助隊受け入れを 首相、ミャンマー支援で - MSN産経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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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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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執行権限の行使は拒否=「聖火防衛隊」で国家公安委員長(時事通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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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房長官会見】「他国の警察等々の力を借りなければならない治安状態にはない」(17日午後)政治も‐社会政策ニュース:イ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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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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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首相「聖火は日本の警察が守る」政治も‐外交ニュース:イ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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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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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首相『現実直視を』――中国外相と会談
産経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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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五輪でブーイングは反感のもと』――福田首相、中国テレビで『忠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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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中、東シナ海ガス田の共同開発で合意、境界線棚上げ-再び対立も(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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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氏「靖国参拝せず」、テレビ番組で語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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靖国問題静かな8月――参拝せず、距離置く首相――新追悼施設、調査費見送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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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印友好議員連盟について : 日印協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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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EU定期首脳協議:「セクター別」案を評価、温暖化対策「有用で建設的」 - 毎日jp(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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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温暖化対策合意へ執念――首相、夜中に電話攻勢
日本経済新聞社
200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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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2050年半減』世界で共有――温暖化ガス――サミット首脳宣言――新興国にも貢献促す
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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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排出量取引秋に試行――温暖化ガス削減長期目標最大で8割――首相が発表
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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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低炭素社会・日本」をめざ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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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 内閣広報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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ポスト京都主導へ一歩――温暖化福田ビジョン――中期目標は『来年に』――基準年見直しが火種
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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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低炭素化実行確約を
朝日新聞東京本社
200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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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首相『危機管理』に懸命――政権発足後、初の大地震
読売新聞東京本社
200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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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初動迅速救助へ連携――政府は総動員体制――発生7分後、官邸に対策室
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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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平成20年(2008年)岩手・宮城内陸地震について(第1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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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府
200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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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平成20年(2008年)岩手・宮城内陸地震に係る岩手県への政府調査団の派遣について(第3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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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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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間も捜索継続を指示 福田首相 - MSN産経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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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岩手・宮城内陸地震】福田首相が被災地視察、まず岩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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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事放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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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二十年岩手・宮城内陸地震による岩手県奥州市等の区域に係る災害についての激甚災害及びこれに対し適用すべき措置の指定に関する政令」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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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糧危機対策、日本の備蓄米に世界が注目 国際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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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輸入備蓄米30万トンを放出』――首相、食料サミットで演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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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第162回国会 衆議院 憲法調査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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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元首相、安倍政権を批判 「国家の破滅近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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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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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元首相が政権批判「内閣人事局は最大の失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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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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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公文書管理法スピード成立 背景に“生みの親”福田前首相(2/2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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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200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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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文書管理法スピード成立 背景に“生みの親”福田前首相(1/2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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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200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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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の風――公文書の不在――根幹に政治の不在
毎日新聞東京本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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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元首相 財務省決裁文書改ざん 一連の政府対応に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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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員のプライベート三味線映像も――「自民党がYouTubeにチャンネル正式開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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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イティメディア
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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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YouTubeに自民党公式チャンネ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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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イティメディア
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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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首相、YouTubeに英語スピーチ動画投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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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ェイ・キャス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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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道路、支出厳格化を徹底=日銀人事「財金連携必要」-福田首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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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事通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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点検福田流――“腹心”不在、戸惑う周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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雇用開発機構解体の意向――厚労省に不信――首相改革主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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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元首相「夫婦別姓、女性の働きやすさには必要か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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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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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首相「理解できない」 サイクロン被害でミャンマー政府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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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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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康夫ありのま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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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内閣広報室
200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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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基礎からわかる「福田康夫」 福田政権 特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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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200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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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調整vs豪腕 福田氏 初当選53歳の遅咲き 小沢氏 田中元首相の秘蔵っ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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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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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福田康夫ありのま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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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内閣広報室
200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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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福田康夫ありのま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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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内閣広報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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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福田首相 (71) ――父の無念、29年ぶりに晴らす
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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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康夫「女と品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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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小泉内閣メールマガジン 第35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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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閣官房内閣広報室
200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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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安倍vs.福田 宰相候補を丸裸に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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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田康夫氏 大仁田氏に「ファイヤ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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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風知草――論客・菅直人の福田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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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谷幸喜のありふれた生活3――大河な日日
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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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文壇アウトローズの世相放談――これでいいのだ!
扶桑社
200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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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特別対談ニッポン経済の『ここ』が危ない!――霞が関の『肉食動物』が国民の金を食いツブす
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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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官僚を使いこなすのは大変だ」 福田前首相が最後の最後に恨み節(2/2ページ)- MSN産経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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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文壇アウトローズの世相放談――これでいいのだ!
扶桑社
200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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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国民との心理的距離は広がるばかり 言語学者が福田「他人事語録」を丸裸にする
講談社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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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国民との心理的距離は広がるばかり 言語学者が福田「他人事語録」を丸裸にする
講談社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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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国民との心理的距離は広がるばかり 言語学者が福田「他人事語録」を丸裸にする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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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兵事件に首相「許されることではない」」政治も‐政局ニュース:イ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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ライス米国務長官:沖縄米兵暴行、「極めて遺憾」と謝罪 - 毎日jp(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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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寄せ困難な年金、1975万件 宙に浮く5000万件 -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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両院協議会会議録情報 第166回国会 国家基本政策委員会合同審査会 第2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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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相「党のビラ、誤解招いた」 年金公約問題で - 年金記録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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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金公約」誤解の原因は選挙用ビラ」 News i - TBSの動画ニュース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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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生氏捨て身口撃で福田氏イライラ…自民党総裁選公開討論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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拉致問題 福田官房長官と安倍副長官が対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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隠蔽(いんぺい)と嘘(うそ)の連鎖 福田長官独占告白『本当は8年間払って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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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うっかりでは済まない」福田領収書改ざん100枚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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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刊フ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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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収書書き換え「改ざんではない」・首相が釈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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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される相撲に」と福田首相 時津風親方解雇で -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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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内康範氏:死去 政治にも影響力 - 毎日jp(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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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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訃報:川内康範さん 88歳 死去=作詞家、作家 - 毎日jp(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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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府は李前総統へのビザ発給問題を明確に説明せ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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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ラえもんのお陰?「福田のび太首相」にブロガー大喜び 2007/09/25 (火) 18:24:20 [中国情報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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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張】中国ギョーザ事件 首相発言に疑問呈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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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氏は親中国派じゃない」中国政府専門家が指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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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は日本から教訓を得るべき」、福田元首相の発言が中国で反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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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康夫人民日报撰文:中国应吸取日本教训对美提高警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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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書案内】習近平はかく語りき―中国国家主席 珠玉のスピーチ集。福田康夫元首相推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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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議院会議録情報 第157回国会 国際テロリズムの防止及び我が国の協力支援活動等に関する特別委員会 第5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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ネット流行語大賞2008結果発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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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首相の「あなたとは違うんです」 Tシャツの販売好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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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田首相の捨てぜりふ、Tシャツなどで大人気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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恒例1000人アンケート 週刊文春版2008年『流行語大賞』発表! 『アラフォー』『キターー!!』『あなたとは違うん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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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年の流行語大賞 ノミネート60語 「何も言えねぇ」「あなたとは違うんです」(1/4ページ) - MSN産経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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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行語大賞辞退の福田前首相が事務局に寄せた意味シンな一文(1/3ページ)- MSN産経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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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深く咲く処 行跡なし(2008年12月2日の急上昇ワードランキング) - Yahoo!検索ランキン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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ようこそ。伊香保温泉 横手館 公式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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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版 大衆人事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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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후쿠다 총리, 전격 사임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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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0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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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막내린 후쿠다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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